'코마'에서 깨어난 그는 '숨결'을 그렸다

입력 2022-11-15 17:45   수정 2022-11-17 17:20


“앞으로 이 환자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겁니다.”

병상에 의식 없이 누워 있었던 미국 현대미술 작가 호세 팔라(49)에게 지난해 의사가 내린 진단이다. 팔라는 작년 2월 코로나19에 걸려 석 달간 혼수상태에 빠졌다. 의사는 만약에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더라도 마비 때문에 더 이상 작품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남은 삶을 집에서만 보낼 줄만 알았던 팔라가 최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를 총 23점의 작품으로 꽉 채웠다. 이 가운데 21점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뒤 만든 신작이다. 전시회 이름은 ‘브리딩(Breathing)’.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그가 생명의 숨결을 담아 만든 작품들이다.
숨결로 나타낸 삶에 대한 의지
쿠바 이민 2세대인 팔라는 원래 도로 주변 벽에 그림을 그리는 ‘길거리 예술가’였다. 열 살 때부터 비보이로 활동했고 ‘액션 페인팅의 대가’ 잭슨 폴록처럼 이리저리 춤을 추며 즉흥적으로 선을 휘갈기거나 물감을 뿌리는 작품으로 이름을 알렸다. 아무리 높고 거대한 벽도 그에겐 한 폭의 캔버스일 뿐이었다.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1층 로비에 있는 약 27m 길이의 대형 벽화도 그의 작품이다.

40년 가까이 미술 작업을 해온 ‘베테랑’ 작가지만 작년에는 그림 그리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혼수상태에 빠져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그의 몸에 있는 근육이 상당 부분 빠져나가면서다. 몸무게도 석 달 만에 30㎏ 넘게 줄었다. 그림은커녕 걷기조차 쉽지 않았다.

거대한 벽에다 춤을 추며 그림을 그리는 건 당연히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는 붓과 물감을 놓지 않았다. 재활치료를 받는 틈틈이 작은 크기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했고, 천천히 캔버스 크기를 키워나갔다.

삶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그는 마침내 ‘숨결’로 표현했다. 작품 길이가 총 5.5m에 달하는 회화작품 ‘내가 남긴 숨결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What can I do with the breath I have left·2022)’도 그중 하나다. 작품은 두 개의 캔버스로 이뤄져 있다. 팔라는 왼쪽 큰 캔버스엔 사람이 천천히 숨을 들이쉬는 모습을, 오른쪽 작은 캔버스엔 한꺼번에 숨을 내뱉는 모습을 그렸다. 강렬한 색의 선들이 서로 엉키면서 공기의 흐름을 나타낸다. 팔라는 “코로나로 인해 폐가 망가져서 가까스로 숨 쉴 때마다 마치 빛이 내 몸을 관통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며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호흡’이 얼마나 중요한지 코로나19를 계기로 깨달은 것”이라고 했다.
캔버스에 옮겨낸 무의식의 세계
혼수상태에서 경험한 ‘무의식의 세계’를 캔버스에 옮기기도 했다. 길이 3.6m에 달하는 작품 ‘공감각(共感覺·Synesthesia·2022)’도 그중 하나다. 팔라는 “혼수상태에 있는 동안 형과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악당을 물리치는 꿈을 꿨는데, 현실인지 몽상인지 분간이 안 갈 만큼 그 경계가 희미했다”며 “그 속에서 봤던 무수한 섬광, 감정 등 형체를 알 수 없는 경험을 회화로 옮겨냈다”고 했다.

그림은 언뜻 보면 질서 없이 마구 휘갈긴 것 같지만, 제작 과정은 꽤나 힘들다. 켜켜이 쌓이는 기억의 층위처럼 여러 색깔을 천천히 쌓아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붓을 사용해 여러 색깔로 캔버스를 채운다. 그런 뒤 팔라가 직접 만든 기계로 튜브에 담겨 있는 물감을 빠르게 짜내서 얇은 선을 그린다. 어떤 부분은 물감이 다 마르기 전에 손으로 섞어서 질감을 살려낸다. 팔라는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1년까지 걸린다”고 했다.

마지막엔 작품에 사용하고 남은 물감을 굳혀서 망치로 깬 뒤 작은 부스러기들을 캔버스에 뿌린다. 팔라에겐 ‘이 작품이 내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인’인 셈이다. 전시는 오는 12월 4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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